2014.11.22 19:43

APEC ‘이번에는 달랐다’


11월10~11일 베이징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한국과 중국이, 북한과 미국이 가까워지는 동맹의 역전 현상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이는 한·미 관계를 물적 토대로 한 냉전이 해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문희 대기자  |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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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호] 승인 2014.11.20  08:23:34

역사 전환기에 행위자들은 무대 위 배우와 같다. 배역의 의미를 그들이 아는지 모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상당한 시간이 흘러서야 그 의미가 선명해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제의 강물이 오늘 흐를 수 없듯이, 11월10~11일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어제의 APEC이 아니었다. 그동안의 APEC은 동아시아 21개국 정상들이 매년 한 번씩 장소를 바꿔가며 모이는 사교클럽에 불과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역사의 현장이었다. 한반도를 짓눌러온 냉전의 닻줄이 풀려나가고, 이념보다는 국익, 그리고 그 국익과 국익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모습이 연출됐다. 국익에는 적과 동지가 없으며 아침과 저녁이 다르다고 한다. 바로 어제까지 우리에게 ‘역사 연대’의 손을 내밀던 시진핑 중국 주석이 아베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 것 역시 국익의 가변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시 주석의 냉담한 표정에서 위안을 구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시점부터 중·일 관계에 변화가 올 것이라는 점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박근혜 대통령은 11월10일 시진핑 중국 주석(오른쪽)과의 정상회담에서 ‘한·중 FTA 타결’을 전격 선언했다.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은 11월10일 시진핑 중국 주석(오른쪽)과의 정상회담에서 ‘한·중 FTA 타결’을 전격 선언했다.

11월11일 오전 APEC 정상회의 세션 1에서 박근혜 대통령으로 하여금 ‘아·태 자유무역지대(FTAAP) 적극 지지’ 발언을 하게 한 것은 따지고 보면 미국과 일본이다. 미국은 자신들이 추진해온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한국이 참여 의사를 밝혔을 때 냉담했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아베노믹스에 대한 태도다. 아베노믹스에 따른 무제한 금융 완화로 정작 일본 자신은 별 재미를 못 보고 있다. 도요타 자동차 하나를 제외하곤 기대한 만큼 수출이 늘지 않는다. 대신 엔저에 따른 수입물가 상승으로 중소기업과 서민은 죽을 맛이다. 


고약한 것은 그 직격탄을 우리가 맞고 있다는 점이다. 엔고 시대 한국 경제의 주축이었던 분야 중 자동차와 석유화학은 일본이 되찾아갔고, 철강·조선·전자·통신은 중국이 급속하게 잠식하고 있다. 한마디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다. 이쯤 되면 ‘근린제국 궁핍화 정책’에 불과한 아베노믹스에 대해 미국이 제동을 걸 만도 한데 수수방관하고 있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이 11월10일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한·중 FTA 타결’을 전격 선언하고 이튿날 FTAAP 지지를 선언한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결국 미국과 일본이 한국 등을 떠밀어 중국이 꿈꾸는 ‘아시아 태평양의 꿈’에 적극 동참하게 만든 형국이다. 그리고 그 여파는 당일 오후 20분 만에 끝난 한·미 정상회담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한·미 간에 정상회담인지 환담인지 알기 힘든 이런 모습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


선언만 하지 않았을 뿐 한국은 이미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 질서에 깊이 몸을 담고 있다. 그 시작은 1994년 11월30일 제31회 무역의 날이었다. 그로부터 4일 전인 11월26일 당시 상공자원부가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1994년 1~10월 중국·타이완·홍콩·싱가포르 등 중화경제권 국가들이 미국을 제치고 한국의 최대 수출시장으로 떠올랐다. 169억5000만 달러로 전체 수출의 22.2%를 차지해, 165억1000만 달러로 21.6%를 차지한 미국을 제친 것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1월10일 오바마 미국 대통령(왼쪽)과 박근혜 대통령 간 정상회담은 전례 없이 20여 분 만에 끝났다.  

ⓒ연합뉴스

11월10일 오바마 미국 대통령(왼쪽)과 박근혜 대통령 간 정상회담은 전례 없이 20여 분 만에 끝났다.

이듬해인 1995년, 해방 50년의 의미가 그래서 더욱 각별했다. 미국에만 의존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균형 있는 외교 전략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각계에 넘쳤다. 국정지표로 ‘세계화’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20년, 이제는 중화경제권이 아니라 중국 한 나라에 대한 수출만으로도 미국의 2배, 유럽의 3배, 일본의 4배 이상이다. 2013년 우리의 대중국 수출 규모는 1413억 달러(전체의 26.1%)로 미국 601억 달러, 유럽연합 473억 달러, 일본의 338억 달러를 합친 액수(1412억 달러)보다 약간 많다. 한국은 이미 ‘아시아’ 국가인 것이다. 박 대통령의 발언은 이를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1980년대 말 베를린 장벽 붕괴와 냉전 종식, 소련의 붕괴로 유럽은 해빙을 맞았다. 한반도에서도 1990년 한·소 수교와 1992년의 한·중 수교로 해빙이 올 것처럼 보였다. 북한에게 옛 소련의 붕괴는 생존의 위협이었다. 북한은 핵개발로 저항하면서 해빙의 상륙을 막았다.


아시아에 남은 마지막 저임 생산기지, 북한 


한반도 해빙을 막은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과 동아시아의 지난 반세기는 전쟁과 봉쇄의 역사다. 그 안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이 미국의 국익, 즉 자본의 이해관계 관철이다. 1950~53년 한국전쟁의 원인과 누가 주범인지를 둘러싼 논의와는 별개로 미국과 일본·독일과 유럽의 전후 부흥은 한반도의 피의 대가로 이뤄진 것이다.


미국이 전쟁에서 우리를 도왔고, 원조를 통해 압축성장의 기틀을 마련해준 것은 고마워할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구한말 이후 미국이 중요한 순간마다 우리에게 가혹했던 점 역시 눈여겨볼 대목이다. 구한말 도와달라는 고종의 간청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했고, 2차 세계대전 승전 이후 전승국임에도 전범국가인 일본에 관대했다. 그리고 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역사 문제, 전후배상 문제, 독도 문제 등에서 피해자인 한국에 가혹했다. 혹자는 “침략국의 가해보다 승전국의 가해가 더 크다”라고 하기도 한다. 오늘날 미국의 일부 연구기관이 일본 우익자금을 받아 챙긴 채 독도가 분쟁지역이라거나, 독도와 다케시마를 병기해야 한다는 식의 행태를 보이는 것은 승전국의 가해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전쟁 이후 1953년부터 1975년까지는 베트남이 그 역할을 이어갔다. 두 차례의 전쟁 기간 미국에 맞선 국가들은 철저히 봉쇄됐다. 1953년 이후 중국과 북한이 그랬고, 1975년 이후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그랬다. 그사이 미국 자본은 1960~70년대 한국·홍콩·타이완·싱가포르를 제1세대, 1980년대 동남아를 제2세대로 한, 저임 생산기지를 떠돌았다. 그리고 1970년대 말 신자유주의 발흥과 함께 중국의 봉인을 해제한다. 10년의 준비 기간을 거친 1990년대부터 중국은 제3세대 저임 생산기지 구실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봉인이 해제된 것도 이때다. 그다음으로 아시아에는 딱 두 곳이 남았다. 바로 미얀마(버마)와 북한으로 이들을 4세대라 할 만하다. 미얀마는 이미 봉인이 해제돼 문호 개방이 진행 중이다. 남은 것은 북한이다. 최근 북한과 미국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주목해야 할 이유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AP Photo</font></div>오바마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은 11월11일 산책이라는 파격적인 정상회담의 모습을 보여줬다.  

ⓒAP Photo

오바마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은 11월11일 산책이라는 파격적인 정상회담의 모습을 보여줬다. APEC 정상회의를 이틀 앞둔 11월8일 미국 외교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던 일이 벌어졌다. 북한에 억류 중인 케네스 배와 매슈 토드 밀러의 석방을 위해 제임스 클래퍼 미국 국가정보국(DNI) 국장이 직접 평양을 다녀온 것이다(북한은 왜 미국인 억류자를 석방했을까? 참조). 정부 당국이나 미국 측은 언론 브리핑을 통해 그의 방북이 억류자 석방이라는 인도적 문제에만 국한했을 뿐 정책 변화와는 무관하다는 방침을 거듭 밝혔다. 그러나 아무리 여러 얘기를 해도 “미국 정보기관 책임자가 적국을 방문한 것은 냉전 시대를 통틀어 처음 있는 획기적인 일이다”(워싱턴 전문가)라는 평가를 피할 순 없다. 그다음 이어지는 말은 “그런 인물이 고작 인질 두 사람만 데리고 나왔다면 소가 웃을 일”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대북 정책을 바꿀 수 있는 세 가지 이유 


클래퍼 방북을 계기로 그동안 가려졌던 DNI의 비밀 대북 정보조직의 실체가 드러났다는 등 뒷얘기가 무성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바로 미국의 대북 정책이 이제 바뀔 때가 되었다는 점이다. 북한을 꽁꽁 묶어놓았던 봉인을 해제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다. “제재는 유엔을 통해서 했지만 해제는 미국의 필요에 의해서 할 것”이라는 얘기가 벌써 나온다. 국내의 한 전문가는 “조만간 미국이 아니라도 영국이든 독일이든 누군가 대북 제재 해제의 필요성을 제기하면 그게 신호탄이 될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전문가들은 왜 미국이 대북 정책을 바꿀 것이라고 보는가.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첫 번째는 러시아의 동진으로 미국 독점 시대가 끝났다는 점이다. 미국의 봉쇄는 다른 나라 자본의 진출을 차단하기 위한 독점의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다른 나라는 다 막아도 러시아는 막기 어렵다. 전 세계적으로 미국에 맞설 수 있는 나라는 여전히 중국이 아니라 러시아라는 게 중론이다. 미국 전문가들의 평가에 따르면 중국은 경제 강국이지만 군사 강국은 아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군사 강국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서방 진출이 막힌 러시아는 19세기 크림전쟁 직후와 마찬가지로 원기 충전을 위해 동쪽으로 진출하고 있다. 러시아 부의 원천인 석유와 천연가스 판로 확대라는 구체적 목적도 있다. 북한과 러시아는 지난 10월 초 이수용이 러시아를 방문할 당시 적절한 시점에 김정은 제1비서의 방러 및 북·러 정상회담에 합의했다는 것이 정통한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김정은 제1비서의 특사 자격으로 11월17~24일 러시아를 방문하는 최룡해 비서의 행보 역시 이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에게 러시아의 귀환은 파산하고 집을 나갔던 친아버지가 선물을 잔뜩 안고 돌아온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앞으로 20년간 250억 달러를 들여 북한 철도 3500㎞를 현대화하겠다는 ‘포베다(승리)’ 프로젝트는 그 징표다. 일부 사업비가 과장됐다는 지적도 있지만, 러시아의 귀환으로 북한의 저임 노동력은 물론이고 막대한 희토류, 우라늄 광산, 서해 유전 등의 보물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게 되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AP Photo</font></div>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와 시진핑 주석의 만남은 의미심장하다. 양측은 11월10일 정상회담을 했다.  

ⓒAP Photo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와 시진핑 주석의 만남은 의미심장하다. 양측은 11월10일 정상회담을 했다.

두 번째는 북한 핵 문제가 더 이상 방치할 수준을 넘어섰다는 점이다. 제재와 인권 압박, 중국을 통한 압력 등 미국이 쓸 카드는 다 써봤지만 위협은 점점 현실이 되어간다. 10월 들어 한국과 미국의 군 수뇌부가 북한의 소형 핵탄두 기술이 실용화 단계에 들어섰다고 실토한 대목이 이를 방증한다. 미국의 한 전문가는 최소한 노동미사일에 장착할 수준이라고 했다. 오키나와를 포함한 주일 미군 기지가 북한 핵무기의 사정거리에 있다는 얘기다. 북한 신포조선소에서 잠수함 발사 핵미사일(SLBM) 장착이 가능한 신형 잠수함이 건조됐고, SLBM 실험시설 및 10여 차례의 실험 흔적까지 발견됐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뉴스다. SLBM을 장착한 북한 잠수함이 대한해협과 태평양을 누비고 다닌다는 것은 “한·미의 대응 태세를 바꿀 만큼 치명적인 일”이라고 조지프 버뮤데스라는 미국 군사전문가가 지적했다. 남은 시간은 1~2년뿐이라고 한다.


북한 내부 변화의 조건도 성숙했다. 지난해 4월 총리에 복귀한 박봉주의 실험이 하나씩 가시화되고 있다. 올해 1월 말 <조선신보> 보도에 따르면 기업체가 국가에 상납하고 남은 이윤의 처분권을 100% 기업 자율에 맡겼다. 농촌에서는 3~5인 단위의 포전담당제가 시행된다. 과거에는 생산물을 (시장가보다 현저히 낮은) 국정 가격으로 의무 수매하고 남은 몫도 국정가로 쳐주었다면, 이제는 생산 실적에 따라 현물을 분배한 후 남은 곡물은 시장과 거의 같은 가격으로 사주는 제도가 시행 중이다. 1990년대 초 중국 개혁개방 초기 수준까지 온 것이다. 최근의 5·30 조치에 이르면 중앙정부가 틀어쥐고 있던 무역권까지 하방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전면 개방도 멀지 않았다. 대북 전문가는 “지난 20년은 준비기였다. 일단 시작하면 발전의 속도가 무척 빠를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1990년대 초 한·소 수교와 한·중 수교에서 막힌 한반도 해빙이 최근 일본의 대북 진출과 이것을 패키지로 한 미국의 대북 진출로 재가동될 때가 왔다는 것이다. 더불어 한국과 중국, 북한과 미국이 가까워지는 동맹의 역전 현상까지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한·중 관계가 심화되고 한·미 관계가 축소된다는 것은 곧 한·미 관계를 물적 토대로 하는 냉전이 해체된다는 것을 뜻한다. 1995년 한국이 중화경제권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이 과정이 시작되었는데도 우리 사회는 전혀 준비가 없었다. 독일은 냉전의 시기를 ‘히틀러의 독일에서 링컨과 처칠과 유럽의 독일로 재생하기 위한 인큐베이팅 기간’으로 삼았다고 한다. 즉 파시즘의 독일을 인권과 민주주의와 세계를 끌어안는 독일로 환골탈태시켰다는 것이다. 핵심 가치는 공존과 협력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지금 군부독재의 유산인 엘리트주의와 부패(관피아) 문제, 그리고 생각이 다른 편을 무조건 적으로 몰아세우는 종북 이데올로기가 횡행하며 사회통합 능력을 상실했다. 북한과의 공존 또는 사회 내부 다른 집단과의 상생·협력은 생각지도 못하는 사회가 돼버린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앞으로 중국 주도의 아시아 질서로 복귀할 때 부딪힐 문제다. 한국이 중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마지막 시점은 조선이 미처 중화체제에서 독립을 이루지 못한 때였다. 그러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면서, 일본이 시모노세키 조약 1조를 통해 조선의 독립을 대외적으로 선언하는 치욕을 겪었다. 그러고는 일제 식민지를 거쳐 1945년 해방이 됐지만, 오늘날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내부의 친일파 문제 등 해방의 과제조차 완결하지 못한 상태다. 중국으로부터의 독립도 자력으로 이루지 못했고 일본으로부터의 해방도 완결시키지 못한 어정쩡한 모습이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미국이라는 절대 강국과 이념이 지배해온 냉전 시대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제 19세기 중국·일본 사이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숙제들과 다시 직면할 수도 있다.


북한의 7월7일 정부 성명을 주목하라 


좀 더 근본적으로는 한국이 아시아에서 평화의 촉발자가 될 수 있을지, 아니면 분란의 원인으로 계속 존재할 것인지가 화두로 떠오른다. 1945년 미국과 소련에 의해 38선이 그어지기 전, 일본과 명나라, 일본과 러시아,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 한반도의 분단 및 분할을 거론했던 역사가 있다. 역사 시대의 한국은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아시아 분란의 복판에 있었던 것이다. 이제 평화의 촉진자 구실을 맡아야 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AP Photo</font></div>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러시아의 동진정책은 미국이 북한 봉쇄를 푸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11월11일 APEC 정상회의 중 푸틴 러시아 대통령(가운데)이 오바마 대통령을 바라보고 있다.  

ⓒAP Photo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러시아의 동진정책은 미국이 북한 봉쇄를 푸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11월11일 APEC 정상회의 중 푸틴 러시아 대통령(가운데)이 오바마 대통령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은 혼자서는 역부족이다. 북한과의 통일 과정에서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독일도 1871년 비스마르크의 1차 통일 이후 파생된 국경과 영토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야 통일이 가능했다. 즉 당사자끼리 단순히 합치는 것이 통일이 아니라 주변국과의 역사적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독일 통일이 유럽의 통합과 떼려야 뗄 수 없이 동시에 진행된 이유다. 마찬가지로 한반도 통일 역시 19세기 이래 미완의 과제인 중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의 완결, 그리고 아시아 분란의 주역인 양국의 화해 및 통합과 맞물려서 진행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북한의 예상되는 변화상에서 의외의 접점이 찾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현재 ‘우리식 사회주의의 관리 개선’이라는 명제에 집착하고 있다. 즉 사회주의를 고집한다. 그러나 변화를 거부하며 끝까지 사회주의에 집착했던 호네커의 말로를 북한도 잘 알고 있다. 그 뒤 동독은 사회주의 개선, 개건이라는 용어를 쓰다가 국민으로서의 참정권과 자유를 보장하라는 요구에 직면하고, 결국 ‘우리는 한 민족’이라며 서독과의 무조건적인 통일을 주장하는 밑으로부터의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체제의 정체성이 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면 북한은 오히려 위로부터 민족주의를 주장하며 남쪽과 정통성 경쟁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이미 ‘김일성 민족’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에 대한 대비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통일방안 역시 새롭게 제기될 수밖에 없다. 지난 7월7일 정부 성명에서 북측이 남북의 기존 통일방안을 절충한 연방연합제를 제시한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보인다(<시사IN> 제358호 ‘북에서 온 성명 그린라이트인가요?’ 기사 참조). 전문가들은 북한이 민족 개념을 앞세우기 시작하면 비로소 남북 간에 대화의 실마리가 생길 것으로 본다. 그때에 대비해 우리 사회 내부를 점검하고 진정한 통일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검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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