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11 10:32

일본 전자업계, 북한 남포공단에 진출한다?

북한과 일본은 8월29일부터 4년 만에 대화를 시작했다. 일본 전자업계가 남포공단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멀어진 사이에 북한 개발의 주도권이 중국과 일본으로 넘어간다.

기사입력시간 [260호] 2012.09.10  03:45:46 남문희 기자 | bulgot@sisain.co.kr  

일본 전자업계가 북한 남포공단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엔고와 신제품 개발 실패 등으로 국제경쟁력이 추락한 일본의 소니 등 세계적 전자 메이커의 노후 생산시설을 조만간 경제특구로 지정될 것이 확실시되는 북한 남포로 옮겨 부활의 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본 전자업계의 남포 진출은 북·일 수교가 이뤄질 경우 북한에 지불할 100억 달러(약 11조3000억원) 전후의 청구권 자금과 연동돼 있다. 따라서 이것이 실현된다면 북한 경제와 일본 산업에 미치는 효과뿐 아니라 한반도 및 동북아 정세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과 일본은 지난 8월29일부터 베이징에서 4년 만에 북·일 정부 간 대화를 시작했는데, 앞으로 이 문제 역시 주요 현안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수교 배상금 명목으로 생산시설 이전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일본 전자업계의 남포 진출을 둘러싼 북·일 간 접촉이 8월17일을 전후해 베이징에서 이뤄졌다. 최근 북·일 접촉 과정을 들여다보면, 김정일 위원장 사망 이후 금년 초부터 북·일 양측은 그동안의 난제였던 납북자 문제를 우회해, 제2차 세계대전 기간과 그 이후 북한에서 사망한 일본인 유골 반환 및 가족 참배를 새로운 이슈로 해 접촉을 유지해왔다. 그러던 중 지난 7월21일~8월4일 있었던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의 방북을 기점으로 양국 간 논의가 급진전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즉 후지모토 겐지 방북을 계기로 8월9~10일 10년 만에 베이징에서 북·일 적십자회담이 열렸고, 바로 이 회담을 계기로 청구권 자금과 전자업계의 진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별도의 협의 창구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8월29일부터 정부 간 대화로 이어진다.


8월17일께 이뤄진 북·일 접촉의 북한 측 창구는 북한 합영투자위원회(대표 이광근)였다. 2010년 7월 해외 투자 유치를 위해 발족한 합영투자위원회는 북한 내각의 성급 국가위원회로, 금년 4월부터 베이징 사무소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투자 유치 활동을 벌여왔다. 당시 합투위의 일본 측 협상 파트너가 어디였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는 북·일 수교가 이뤄질 경우 북한이 요구할 수교 배상금(청구권 자금) 규모와 이를 매개로 한 일본 전자산업의 남포공단 진출 문제가 주로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수교 배상금 규모와 관련해 북한 측은 300억 달러 선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는 그동안 거론돼온 100억 달러 선의 3배로, 일본 측이 실제 받아들일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다만 액수와 상관없이 1965년 한·일협정 때와 마찬가지로 지급 방식을 현금과 현물로 하게 될 경우, 현물 지급의 일환으로 소니 등 일본 유수 전자 메이커의 노후 생산시설을 북한 남포공단으로 이전하는 방안이 검토됐다는 것이다.


성사만 된다면 이는 북한이나 일본 양측의 이해관계에 부합한다. 먼저 9월 말, 10월 초 신의주·남포·해주·칠보산 등을 특구로 지정 발표할 예정인 북한 처지에서는 경쟁관계에 있는 한국·중국·타이완 등의 대북 진출을 자극할 수 있는 호재이다. 또한 전자산업 유치는 김정은 제1비서가 강조해온 지식경제형 경제 강국의 취지에도 부합한다. 일본 처지에서도 남포는 수도 평양과 지근거리일 뿐 아니라 북한 내에서 그나마 인프라 시설이 갖춰진 대표적 경공업 도시라는 점에서 전자산업 입지로는 최적이다. 북한이 앞으로 발표할 특구 계획에서도 남포는 IT·전자산업에 특화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남포항을 끼고 있어 물류 수송 면에서도 유리하다. 이런 이유로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국내의 삼성과 LG도 남포 진출을 검토한 바 있다.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위)의 방북을 계기로 북·일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일본은 어차피 북한과 수교할 경우 100억 달러에 상당하는 청구권 자금을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이것과 연동해 노후 산업시설을 이전하고 북한의 양질의 저임 노동력을 활용할 경우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판단이다. 특히 지난 몇 년간 일본의 대표적 산업인 전자산업이 엔고와 제품 개발력의 한계로 벽에 부딪힌 데다 중국 진출 실패 이후 더 이상 출구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남포공단 진출이 성사되면 돌파 구를 마련하게 된다는 의미도 있다. 또한 청구권 자금과 연동해 산업시설을 이전하는 문제는 이미 과거에도 검토한 경험이 있다. 1996년 9월 북한의 나진·선봉에서 열린 투자설명회 당시 일본 유수의 설계 회사인 도요엔지니어링 사가 청구권 자금과 연동해 도쿄 인근의 임해공업단지인 가시마 공단의 석유화학 생산 기지를 나선 지역으로 이전하는 구상을 발표한 것이다.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 일본의 대표적 재벌 기업들이 관여된 이 구상의 핵심은 일본 고도성장기의 주역에서 환경유해 산업으로 전락한 석유화학 단지를 통째로 북한 나선 지역으로 이전한다는 것이었으나 실행에 이르지 못하고 도상계획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신의주는 중국에, 남포는 일본에?


2000년대 들어 한국이 금강산 관광을 통해 원산까지 영향권에 넣게 되고, 러시아가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한반도 종단열차 연결을 위해 청진까지 남하하게 되면서, 일본은 지정학적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동해연선 개발에 뛰어들 틈을 놓치게 되었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중국이 나진항에까지 진출함으로써 한반도 동부에는 더 이상 발을 붙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공동화한 가운데 북한이 특구 개발을 시도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경공업의 메카라 할 남포가 무주공산으로 남아 있게 됨으로써 일본에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셈이다. 예를 들어 신의주는 이미 홍콩계 자본인 대중화그룹이 선점한 상태다(<시사IN> 제258호 참조). 6월 북한 합영투자위원회와 투자 계약, 그리고 7월에는 중앙정부 비준까지 떨어졌다. 8월13~18일 이뤄진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의 방중 기간 북·중 양국 간 협의에서 중국은 북한이 요구한 대규모 차관 제공에는 난색을 표했지만 신의주를 특구로 개발하고 여기에 대중화그룹이 투자하는 것에는 동의했다고 한다. 다만 중국은 중국 정부 차관이나 공산당 자금, 국영기업 투자 및 은행 융자에 의한 자금 진출에는 난색을 표했다.


북한이 대중화그룹에 신의주 전체를 맡기는 식은 아니지만 이미 홍콩 자본이 선점 효과를 차지한 마당에 남포를 누가 선점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실 한국·일본 등 전자업계의 주요 관심사라 할 것이다. 그동안은 일본이 대북 봉쇄를 둘러싼 한·일 공조 때문에 한국 정부를 어느 정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일왕 관련 발언 이후 과거사에 대한 족쇄를 걷어차버린 것과 마찬가지인 일본은 이제 대북 진출에서도 거칠 것이 없어졌다. 


때마침 8월29일부터 북·일 정부 간 회담이 4년 만에 열렸고, 일본 측 표현에 따르면 이 회담은 ‘북·일 정부 간 협의를 재개하기 위해 제반 현안을 폭넓게 다루는 예비회담’이다. 제반 현안이라 해봐야 납북자 문제 등 그동안의 단골 메뉴를 빼면 일본 전자산업의 사활이 걸린 북한 진출 문제야말로 숨겨진 최고 현안이라 할 것이다. 한국 정부가 ‘통일 항아리’ 운운하는 자족적·자폐적 대북 정책에 갇혀 있는 동안 북한 개발의 주도권마저 중국·일본에 넘어가게 생겼다.

Trackback 0 Comm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