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5.06 17:54

'북·미 공조'에 빛바랜 이명박 방미 효과


5월 말 라이스 방북, 이익대표부 개설, 7월 초 부시 대통령 방북이라는 북한-미국 간 싱가포르 합의 내용을 모른 채 시작된 이명박 대통령 방미는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32호] 2008년 04월 21일 (월) 11:31:43 남문희 전문기자 bulgot@sisain.co.kr
   
ⓒ연합뉴스
미국을 방문 중인 이명박 대통령 내외가 뉴욕을 떠나 워싱턴으로 향하면서 환송 나온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4월 말부터 테러지원국 해제 절차 시작, 5월 말 라이스 장관 방북 및 북한과 준 대사급 이익대표부 개설 합의, 7월 초 부시 대통령 방북, 북·미 관계 정상화.’ 지난 4월8일 싱가포르 합의를 계기로 북한과 미국이 비밀리에 그려온 북·미 관계 정상화 스케줄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이 끝나는 4월 말부터 미국이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 절차를 시작해 5월까지 완료한다. 그 뒤 라이스 장관이 평양에 가서, 김정일 위원장과 연락사무소보다 격이 높은 이익대표부 개설에 합의하고, 마지막으로 부시 대통령이 7월 초 서울을 거쳐, 평양에 들어간다.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의 막이 오르는 것이다. 핵 신고 문제로만 좁혀졌던 4·8 싱가포르 북·미 합의 이면에는 북·미 간 이같은 엄청난 그림이 숨겨져 있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가 이러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방미 전략을 수립한 것 같다는 점이다. 이 대통령이 미국 방문 전 이 사실을 알았다면, 한국을 제치고 미국과 통하는 ‘통미봉남’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식의 4월13일 발언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대통령이 방미 중 워싱턴에서 갑자기 북한 측에 서울과 평양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하자는, 지금까지와 전혀 앞뒤 맥락이 맞지 않은 제안을 한 것을 보면, 워싱턴에 도착해서야 미국으로부터 북·미 관계 스케줄에 대한 설명을 듣고, 부랴부랴 이런 설익은 제안을 내놓은 게 아닌가 싶다. 정부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4·8 싱가포르 합의 문건을 정부가 구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미국이 그때그때 필요한 부분만 떼어내어 설명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현재 진행 중인 북·미 관계의 폭과 깊이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이해 부족은 결국 이번 대통령 방미 협상의 실패로 이어졌다.

‘4·8 합의’ 인정으로 맥빠진 북핵 공조

지난 4월15일 데이너 페리노 백악관 대변인이 ‘부시 대통령이 싱가포르 합의에 동의했는가’라는 기자 질문에 “그렇게 믿는다, 예.(I believe so. Yes.)”라고 대답한 순간, 이명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은 김이 새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청와대가 설정한 방미 목적 4가지, 즉 한·미 동맹 복원, 북핵 공조, FTA 동력 점화, 경제협력 중 성과를 기대할 만한 것은 ‘북핵 공조’밖에 없었는데, 이마저 김이 새버렸다. 지난 4월19일자 <시사IN> 제31호에서 워싱턴의 중요한 정보 소스를 인용해, 4·8 합의 직후 청와대 측이 미국에 “싱가포르 합의 발표를 이명박 대통령 방미까지 미뤄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을 보도한 이후, 추가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 당시 청와대 요구에 대한 미국 측 협조는 실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힐 차관보의 갑작스러운 말 바꾸기, 4월12일 라이스 장관의 우정 출연. 여기에 ‘미국 의회의 반발과 부시 대통령의 격분’을 주로 보수 언론의 한국 특파원들에게 ‘눈에 본 듯이’ 전한 익명의 소식통까지. 청와대로서는 짧은 순간이나마 ‘한·미 공조’를 만끽하기에 족했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대통령이 ‘짠’ 하고 워싱턴에 등장해 북한과 합의를 인정하도록 부시 대통령을 ‘설득’하기만 하면, 스타로 떠오를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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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오른쪽)이 뉴욕 JFK 공항에 도착해 힐 차관보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그렇게 되도록 뒷짐 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4월9일부터 사흘 일정으로 평양을 방문 중이던 토니 남궁 씨(뉴멕시코 주지사 리처드슨 상원의원 고문)를 붙들고, 북한이 노발대발했다. “도대체 뭐냐. 합의를 깨자는 거냐.” 미국 정부와 깊은 채널이 있는 토니 남궁 씨가 워싱턴에 긴급 타전, 놀란 워싱턴이 부랴부랴 기자 질문에 답하는 군색한 형식으로 부시 대통령이 이미 4·8 합의를 승인했다는 사실을 실토해버림으로써 1주일에 걸친 손님맞이용 연출극은 막을 내렸고, 북핵 공조라는 대통령 방미 1순위 목표 역시 허공으로 사라졌다.

워싱턴이 북한의 반발을 예상하면서도 청와대 의 무리한 요구에 귀를 기울였던 것은 이 대통령에게 요구할 건 많은데 선물로 줄 게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정상회담 전 한·미 간 협상 결과 역시 알짜는 미국이 챙기고 한국은 잔뜩 부담만 짊어지는 것이었다. 쇠고기 시장 개방을 둘러싼 협상에서 한국은 그동안 금과옥조처럼 여겼던 30개월 이상 수입 금지라는 기존의 연령 제한을 폐지해, 전국민을 광우병 위험에 노출시켰다. 이 대통령이 그나마 성과라고 얘기할 만한 비자면제 프로그램(VWP) 양해각서(MOU) 체결도 따지고 보면 이미 노무현 정부 때 2008년 말까지 시행하기로 합의했던 사항이다. 내부를 들여다보면 사실 문제 투성이다. 비자 면제를 받는 대가로 미국에 전국민의 전과사실 조회자료(Criminal Report)를 제공해야 한다. 개인 정보를 보호하는 국내법과도 충돌하고 인권 침해 논란도 제기된 상태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번에 11억8000만 달러 투자를 유치했다고 언론이 대서특필했으나, 그 중 10억 달러에 이르는 프롤로지스 사의 경기도 일대 물류단지 투자 건은 사실 노무현 정권 때인 지난해 말 MOU 체결이 이뤄졌다.

 미국의 ‘동맹 복원’ 요구에 시달린 이 대통령

따지고 보면 뭐를 성과라고 해야 할지 모호하다. 반면 군사안보 분야에서 이른바 한·미 동맹 복원을 명분으로 미국이 이번에 관철하고자 하는 쇼핑 리스트는 정말 어마어마하다. 대북 퍼주기를 능가하는 대미 퍼주기 소리가 안 나올 수 없는 상황이다. 지난 4월12일자 <시사IN> 제30호에서 밝힌 ‘한·미 동맹 6단계 로드맵’은 사실 미국이 가지고 있었던 이면의 구상이다. 그 내용이 알려진 뒤 미국은 마치 자기 페이스를 잃은 것처럼,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요구 사항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즉 범태평양안보협의체(PAPSU) 결성 △MD PSI 가입 △첨단무기 구입 △방위비 증액과 기지 이전비 부담 △전시작전통제권 재협의 등 기존 6단계 로드맵에 있는 내용 외에도 아프가니스탄 재파병, 이란 제재 동참 등, 이 대통령과 정부 부처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다.

사실 이 대통령이 생각한 한·미 동맹 복원은 이런 게 아니었다고 한다. 적당히 생색 내주고, 미국으로부터 경제 살리기 도움을 얻고자 하는 실용주의적 접근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선수를 쳐버린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무척 당황했다”라고 정부 사정에 밝은 전문가가 지적한 대로, 이번 방미는 사실 대단히 부담스러운 여행이었다. 그래서 미국 방문 직전 청와대는 나름으로 대책을 세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즉 이번에는 한·미 동맹 복원 내지, 21세기 전략동맹의 개념만 정리하고, 미국 요구와 관련한 세부 논의는 ‘지속적인 실무 협의’로 넘겨, 7월 부시 대통령 방한 때 결론을 낸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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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5일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코리아 소사이어티 만찬에서 연설하는 이명박 대통령.
그러나 이것은 잘못 짚어도 한참을 잘못 짚은 대책이었다. 한국 정부는 아마도 부시 대통령이 8월8일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참석 일정에도 불구하고 7월 초 서울에 오겠다고 한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사실 부시 대통령의 7월 서울 방문은 서울이 목적이 아니라 4·8 싱가포르 북·미 합의에 따라 평양 방문이었다. 따라서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기 싫어하는 부시 대통령이 역사적인 평양 방문을 앞두고 서울과 골치 아픈 협상을 전개한다는 것은 사실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렇게 따지면 미국도 이번 이명박 대통령 방미 때가 아니면 자기 요구를 관철해낼 시간이 물리적으로 부족하다. 이런 이유로 워싱턴의 정보 소스들은 이 대통령 방미 전부터 “미국이 이번에 모든 요구를 다 제기할 것이고, 반드시 한국의 답을 받으려고 할 것이다”라고 경고해왔다. 그들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이번 미국 방문은 대단히 힘든 여행이 될 것이다”라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그동안 한·미 동맹 복원을 소리 높여 외쳐온 것은 바로 이명박 정부다. 미국이 ‘한·미 동맹을 복원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라며 요구 사항을 들이밀면 할 말이 없다. 전임 노무현 정권이 말로만 반미를 외쳤지 실제로는 미국의 요구를 다 들어줬다는 것을 이 정부 사람들이 제대로 간파를 못한 것도 큰 실책이다. ‘노무현 정부도 아프간 파병을 했는데…’라면 거부하기 어렵게 돼 있다.

더구나 미국은 이명박 정부의 약점을 훤히 꿴다. 바로 이명박 정부에게 ‘북한 카드’가 없다는 점이다. 그동안 미국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부담스러워하고 한·미 동맹 훼손 운운하며 비난해온 것은 바로 이들이 북한 카드를 쥐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쥔 이상 미국은 한국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한국이 언제든 북한과 손잡고 ‘사고’를 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맙게도 이명박 정부는 한·미 동맹 복원에 몰입하느라 자신의 가장 중요한 협상 무기인 북한 카드를 헌신짝 버리듯 했다. 미국에는 김영삼 정부 이래 10년 만에 ‘봉’을 만난 기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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